032. 슬럼프
글쓰기 시작한 게 5월부터니까 슬럼프가 왔다고 하기에도 부끄럽지만 최근 글쓰는 재미가 급격히 사라졌다. 컨셉진 프로젝트 특성상 읽고 반응해주는 사람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유림님과 통화하다가 숙제하는 기분이 들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다.
문구점응 10주 글쓰기 프로그램도 인증을 했지만 열 명의 소수정예 그룹이라 서로의 글을 읽고 댓글도 달아주며 함께 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여긴 150명이라는 대규모 그룹으로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구조인데다, 신청할 때 입금한 5만원을 인증 횟수에 따라 돌려주는 방식이라 더 강제력이 느껴진다. 굉장히 모순적이다. 다른 곳의 글쓰기 프로그램은 참여비를 돌려주지 않으며 그게 당연하다. 그런데 열심히 쓰면 그만큼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게 동기부여가 아니라 오히려 쓰기 싫게 하는 요인이라니. 나만 그런가? 5만원 안 받으면 그만인데. 그냥 무시하고 쓰자고 생각한다. (그래도 신경쓰일 거 알지만.)
돈에 있어 합리적이긴 쉽지 않다. 1,200원 아끼겠다고 30분 안에 환승하려고 뛰면서 한 잔에 15,000원 하는 와인은 잘도 시킨다. 나의 경제적 선택 기준에 관해 고민한 적이 여러 번 있는데, 지금까지 지켜봐온 소비자 장혜림은 다음과 같다.
1. 필요하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
형욱님이 전에 물어본 적이 있었다.
"혜림님은 필요하지 않은 뭔가를 그냥 갖고 싶어서 산 적 있어요?"
"그럼요!"
"뭐요?"
"....."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 전에 엄마와 다시 한 번 생각해봤는데 여전히 없더라. 난 필요하지 않으면 별로 갖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보다. 옷이나 신발도 애용하던 게 다 떨어져서 못 쓰게 될 때쯤 대체할 물건을 사야겠다는 마음으로 쇼핑하니까 스트레스다.
2. 싸게 살 수 있으면 싸게 산다.
당연한 거지만, 예를 들면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보다 사고 싶은 책을 고르면 교보문고 앱에 들어가 바로드림으로 주문하고 책을 가져가 결제한다. 온라인으로 구입하면 10% 할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독립출판에 관심이 생겨 대형서점이 아닌 독립서점에서 사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접근성이나 습관을 핑계로 아직 실천에 옮기진 못했다. 샴푸 하나를 주문할 때도 네이버 쇼핑으로 최저가를 살펴보고 주문한다.
3. 내 몸과 마음에 투자한다.
너무 돈을 못 쓰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아낌없이 쓰는 분야는 나를 위한 투자다. 한 번에 7만원인 PT 레슨을 일주일에 두세 번씩 받으면서 비싸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고 한 시간에 10만원인 상담료는 내가 쓴 돈 중 가장 가치있다고 느꼈다. 반면 택시는 웬만해서는 타지 않는다. 지금까지 택시를 탄 횟수가 손에 꼽는데, 보통 짐이 아주 많거나 손발이 떨어져나갈 것 같이 춥거나 욕 나오게 덥거나, 아니면 약속시간에 늦었을 때. 단순히 비용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택시를 그닥 좋아하지도 않고, 두 발 멀쩡한데 좀 걷지 뭐, 싶은 마음이다.
4. 물건이 아닌 경험을 산다.
서른이 되기 전에 꼭 하고 싶었던 게 세 가지 있었다. 1) 독립, 2) 내 차 소유, 3) 뉴질랜드에서 번지점프. 이 중 서른이 되기 전에 달성한 건 3번 하나지만, 1번과 2번을 저울질하며 준비하고 있었고 결국 서른 생일을 몇 달 넘긴 시점에 독립했다. 아우디 A5를 좋아해서(지금도 차를 산다면 A5다) 시승도 했는데 사무실 5분 거리인 역삼역으로 독립하면 차는 그야말로 주차장에만 세워둘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2번을 버리고 1번을 택한 건, 3번 때문이었다. 뉴질랜드가 너무 좋아서, 나에게 A5를 살 돈이 있다면 뉴질랜드를 열 번 더 다녀오겠다 결심했다.* 내 지출은 대부분 경험을 사는 데 쓰인다. 여행을 가거나 맛있는 걸 먹거나, 무언가를 배우거나.
*작년 뉴질랜드 여행에 거의 천 만원을 써서, A5 살 돈으로 열 번은 못 가는 걸로.. (물론 등산복, 등산화, 등산가방 등 각종 장비값까지 포함이다.)
그러니까, 컨셉진에 낸 5만원은 글쓰는 경험을 산 거다. 4번이니까 아까워할 필요 없는 거다. 그런데 싸게 살 수 있으면 싸게 사려는 2번과 충돌하나보다. 😑😑



1번ㅎㅎㅎ 낡아가는 백팩 때문에 고민하시던 게 생각나네요. 저는 물욕이 충만해서 백팩만 몇 개인지... 3번, 4번은 정말 공감!
ReplyDelete웰컴백 :)
맞아요! 몇 년 버티다 Valencia St.에 Topdrawer에서 겨우 샀죠. 다행히 잘 들고 다녀요 ㅎㅎ
Dele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