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감정 고자

며칠 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마음이 심란했다. 감정 고자인 나는 감정조차 분석하려 드는데, 불안하더라도 그 이유를 알면 아주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 예를 들어, 다음 주에 끝내야 하는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 불안하다거나, 만나기 싫은 사람과 약속이 잡혀있어 긴장을 느낀다거나. 이유가 파악이 되면 '아 그래서 내가 지금 심란하구나'하고 안심이 된다. 불안감이 가시는 건 아니지만, 내가 괜히 그런 게 아니라는 위안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내 감정을 남에게 납득시킬 필요는 없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정답이다. 다른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데 너는 왜 그래? 너보다 더 안 좋은 조건에서도 다들 잘 하는데 너만 유난 떨어? 크게 잘못된 말이다. 감정과 느낌에 있어 내가 곧 정답이다. 이걸 알면서도 내 감정이 납득이 되지 않으면 나부터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나의 천적이다. 

상담을 받을 때도 가장 어려워한 질문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나요?'였다. 질문에 답한다고 하는 말이 결국 다 생각이었다, 느낌이 아니라. 감정이 느끼는 게 두려워 감정 회로를 차단시킨 것 같았다. 감정을 차단한 대신 이성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머리가 좋아 성인이 되고도 한참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잘 살아온 것 같다고 상담 선생님이 말했다. 이성만으로 사는 게 불편했으면 훨씬 더 일찍 불편함을 느끼고 살펴봤을 거라고. 신기했다. 예전부터 나는 내가 머리가 좋다는 게 감사하면서도 싫었다. 오죽하면 교보문고에서 멀리 매대에 "똑똑한 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책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뚱뚱한 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였지만.. 엄마가 다른 데서 이런 말 하지 말라고 했다. 재수없다고 욕한다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레아는 '혜리미'가 숨어있다고, 내가 자꾸 재운다고 한다. '혜리미'는 겁쟁이라 잘 나오지 않는데 레아를 좋아해서 레아가 있으면 가끔 고개를 내민다. 반겨주고 예뻐해주면 자주 나올 것도 같은데 나는 자꾸 재운다. 


 


Comments

  1. 새 책 아이디어! '똑똑한 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by 혜림장 (매니악하지만 지지합니다!)
    비슷해서 잘못 볼만도 하네요ㅎㅎㅎ

    저도 곧잘 감정 분석가의 길로 들어서는데 제가 내린 결론은 남한테 이해받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인 것 같아요. 나에게 설명하는 건 누군가에게 말하기 전에 하는 예행연습. 내가 나를 사보타주하는 덫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정말이지 쉽지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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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해 받고 싶어서가 정답이네요. 오늘 연기 수업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었어요. 나는 다른 사람에게 열려있는데(공감을 잘 하는데) 나를 다른 사람에게 열어서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나를 이해 못할까봐 두려워서. 슬프네요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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