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2차 트라우마
어제 <이슈 픽! 쌤과 함께>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듣도 보도 못한 방송이었는데 '뭐지?' 하면서 지켜보니 주제별로 전문가를 초대해 특강을 듣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날은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가 '쌤'으로 나와 코로나 블루를 이야기하는데 나도 모르게 끝까지 다 봤다. 눈물까지 흘리며...
몇 년 전 "당신이 옳다"는 책을 읽고 이 분의 북토크를 가고 싶었는데, 어쩌다 지상파 TV로 보게 된 셈이다.
사실 모르는 내용은 아니었다. 책을 읽기도 했지만 이 책이 아니더라도 이젠 상식이 된 우울증, 트라우마, 공감을 다뤘다. 하지만 이 분의 차분한 말투와 사례를 들어 이야기할 때 눈시울이 붉어지는 모습이 듣는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고 공감에 평생 목말라온 나에게는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주제다.
그 중 특히 와닿은 말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2차 트라우마라고. 성폭력 피해자를 예로 들었다. 성폭행을 당한 사건 자체가 1차 트라우마다. 끔찍한 일을 겪고 겨우 살아남은 피해자가 오랫동안 혼자 견디다 용기를 내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엄마의 반응은 "이 얘기 누구한테 했니? 엄마한테 처음 얘기하는 거니? 어디 가서 절대 이 얘기 하지마라. 너 결혼도 못 한다."였다고 한다. 이 피해자는 자살했다. 결국 가장 믿고 기대고 싶었던 사람에게 그런 반응을 들은 피해자는 2차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한 거다.성폭행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 사례를 들으면서 떠오른 에피소드가 있다. 내가 살던 오피스텔에 불이 난 적이 있다. 새벽 3시에 "살려주세요"하는 소리(잠결에 귀신인 줄 알았다)에 깨어 현관 쪽으로 가보니 연기 냄새가 나 허둥지둥 현관 문을 열었다. 복도는 연기로 자욱했고 잠옷 바람으로 계단을 찾아 7층을 걸어내려갔다. 다행히 큰 불은 아니었고 불이 난 집에 사는 한 명만 연기를 마셔 실려갔다. (다음 날 기사를 보니 술 마시고 담배를 물고 잠들었다고... 😳) 그 날 나는 택시를 타고 부모님 집으로 가서 잤고 그 뒤로 일주일을 넘게 돌아가지 못했다. 무서워서. 오피스텔에 돌아온 후에도 복도에서 무슨 소리만 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고 밖에서 나는 소리를 못 들을까봐 음악도 안 틀었다. 신기한 건 불이 또 날까봐 무서운 게 아니라 모든 게 무서워졌다. 나는 범죄에 둔해서 카페에서 노트북을 하다 열어놓은 채 화장실 가는 건 물론이고 밤길을 혼자 걸어도 불안한 적이 없었는데 그 뒤로 한동안 모든 게 무서웠다. 당시 상담 선생님은 이런 일을 겪으면 '나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자각이 갑자기 생겨 그렇다고 설명하시며 이런 게 트라우마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무서워서 오피스텔에 있기 싫다는 말을 하자 엄마는 "뭐가 무서워!"라고 나무랐다. 그때 너무 서러워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제 방송을 보고 나니 그게 2차 트라우마구나...
공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게도 하는데, 쉬운 게 아닌가보다. 성폭력 피해자의 어머니도 딸을 위해서 한 말임이 분명한데 결국 그 말이 딸을 죽였으니...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