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놓음과 닿음

 

못 버리는 물건들은 대개 추억과 관련된 어떤 사연이 있고, 결국 못 버리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에 담긴 사연이라는 얘기였다. 이건 첫사랑이 선물해준 목도리고, 이건 아버지가 졸업 기념으로 사준 필름카메라고, 이건 대학입시 수험생 시절에 끼고 살았던 CD플레이어고. 그래서 사람이 소유한 물건은 딱 두 종류로 나뉜다. 실생활에 필요해서 구입한 물건과 사용 시효가 이미 지났으나 사연이 담겨 있는 물건. 친구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물건을 정리하려면 결국 추억을 정리해야 한다고. 사연이 있는 물건부터 내다버릴 수 있어야 비로소 필요한 물건만 남게 된다고.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버림'과 '놓음'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람에게서 온 어떤 것도 버릴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와서 닿았으니 놓아 보내는 것이지 버릴 수 있는 건 아니라고 (...) 지나간 것을 놓아야 다시 새롭게 닿을 수 있다. 억지를 부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이유가 없다. 관계는 고이지 않고 흐른다. 관계는 멈추지 않고 쉼 없이 움직이는 생물이다. 어디에선가 누구는 놓고 어디에선가 누구는 닿는다. 살아 있음으로 그리워하고 살아가야 하므로 잊는다. 

- 림태주 <관계의 물리학> 중 '놓음과 닿음'


부모님 집 내 방 옷장 위쪽 선반에는 라벨이 붙은 상자 6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모두 추억의 물건들이다. 사촌동생의 초등학교 졸업 축하 카드에서부터 수능 시험을 앞두고 언니와 아빠한테서 받은 카드, 수업시간에 친구들과 주고 받은 꼬깃꼬깃 접은 쪽지까지 버리지 않고 갖고 있다. 심지어 이름을 봐도 기억나지 않는 편지도 있다. 

 


학교에서 받은 상장은 물론, 교지와 정리 노트, 심지어 좋아하는 과목의 교과서도 안 버렸다. 대학교 대기과학 시간에 그린 대기선도까지 발견했다. 수학 시간에 쓰던 공학계산기와 통번역대학원 때 쓰던 전자사전은 이제 전혀 쓸 일이 없는데도 추억의 물건으로 갖고 있다. 심지어 초등학교 때 잠깐 켰던 바이올린도.

  



내가 추억을 정리하지 못하는 거겠지. 관계 맺는 데 서툰 것만큼 관계를 끝내는 데도 서툴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어렵다. 생각해보니 남자친구들과도 매번 깔끔하게 끝낸 적이 없다. 계속 연락을 끊지 않다가 몇 년이 지나 다시 만나기도 하고. 

내 방에는 고등학교 교복도 있고 내가 아끼는 이불도 버리지 못하게 했다.
'놓음'을 배워야 하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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