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그냥 당신이 좋아서
림태주 <관계의 물리학> 중
도다리쑥국을 먹으러 가자고 친구들이 꾀었다. 나는 여태껏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그 맛이 몹시 궁금해서 버텨낼 수가 없었다. 일을 팽개치고 통영 욕지도에 가서 하루를 묵었다. 남해의 봄밤은 쉽게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기에서 물고기 비늘 냄새가 났다. 이른 아침 일찍 깨 민박집 텃밭으로 나갔다. 갓 꽃망울을 터트린 수선화 꽃이 노랗게 인사를 했다. 간밤에 비가 다녀갔는지 젖은 흙에서 해초 냄새가 피어올랐다. 일행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는 하릴없어 수선화와 봄비의 관계에 대해 추리해보기로 했다. 사물들의 은밀한 관계를 들춰보는 버릇은 나의 취미 중에 하나다.
나는 먼저 수선화를 심문했다. 봄비가 내려서 꽃을 피운 것인지, 아니면 봄비와 상관없이 오늘을 개화일로 정하고 있었는지를 물었다. 수선화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봄비를 심문했다. 꽃을 피우려 애쓰는 수선화를 도우려고 내린 것인지, 아니면 내리고 보니 수선화가 피고 있었던 것인지를 물었다. 봄비도 아무 말이 없었다.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나는 꽤 유능한 탐정이라 사건 현장을 중심으로 면밀한 탐문수사를 벌였지만 유효 한 제보가 없었다. 초봄이고 한밤중의 일이라 목격자 식물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진술이나 물증이 없어 둘의 관계를 입증하기가 힘들지만, 나는 두 피의자가 예사로운 관계가 아니라는 심증을 굳혔다. 둘 다 짠 듯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지만, 수선화는 봄비의 고마움을 잊지 않는 듯하고, 봄비는 그런 수선화에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둘의 공모 관계를 더욱 의심하게 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한 줄의 수사보고서를 작성하고 내사를 종 결했다.
'봄비는 그냥 내렸고, 수선화는 그냥 피었다.'
일행이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나는 기척이 들렸다. 우리는 어떤 인연을 지어 여기까지 봄을 맞으러 오게 됐을까.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간절해도 때가 무르익어야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육지의 쑥과 바다의 도다리가 봄날의 때가 되어 뚝배기 안에서 만나 서로를 껴안게 된 것처럼 우리도 예사롭지 않은 인연으로 시절인연을 맺었다. 기실 그냥 내린 비도 그냥 핀 꽃도 삼라만상에는 없는 것이다. 내리고 피는 일, 찰나의 교차점에는 어떤 간곡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 그냥 편해지고 그냥 좋아지는 관계란 없다. 나의 편안함은 누군가가 얼마큼 감수한 불편의 대가이다. 일방적인 한쪽의 돌봄으로 안락과 안전이 유지된다면 결코 좋은 관계가 되기는 어렵다. 봄비와 수선화의 관계처럼 그것이 '그냥'이 되려면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참음도 필요하고, 주고도 내색하지 않는 넉넉함도 필요하고, 고마움을 잊지 않는 마음 씀도 필요하다. 그렇게 가까워지면 확고한 알리바이가 생긴다. 서로를 입증해 줄 수 있게 된다. 묵비권을 행사해도 훤히 알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얽혀있는 공동정범의 관계, 그들은 서로의 관계를 함부로 누설하지 않는다. 둘 사이가 황금처럼 단단해지면 비로소 '그냥' 이라는 말을, 구구절절 해명하거나 설득하지 않아도 통하는 그 말을 할 수가 있게 된다. 당신이 좋아서, 모든 것이 그냥 다 좋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Comments
Post a Comment